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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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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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는 솔내교회이다. 솔내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동(松川洞)에 세워진 장로교회였다. 송천(松川)이라는 한자 지명은 "솔내"로 불려졌다. 이 솔내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솔내"는 "소래"라고도 불려졌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서 선교사나 목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였다. 교회 설립의 시작은 1885년 혹은 1886년 서경조의 전도로 이뤄졌다. 이것은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기 약 1년 전이라 할 수 있다. 솔내교회는 맥켄지(Mckenzie) 선교사의 지도로 외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건물을 지었고 1895년 7월 3일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노바 스코시아에 있는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라브라도르(Labrador)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던 중 조선에 대한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회는 맥켄지의 조선선교 지원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1894년 2월 개인자격으로 조선에 입국 하였다. 

그는 조선에 온 다른 선교사들과는 다른 선교방식을 택하였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인과 같은 방식대로 생활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교의 형태에 있어서 몇가지로 나뉘는데 그것은 정복선교, 적응주의선교 등이 그것이다. 정복선교의 대표적인 예로는 "예수회"의 선교라 할 수 잇다. 예수회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장의 루트를 따라 전개되었다. 그들의 선교는 일종의 군림하는 선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고국에서의 일상 삶을 선교에 있어서 십분 이용했다. 자기 문화의 우월성이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적응주의 선교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피선교지에 정착하여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그들과 같은 식사를 하며 그들과 같은 집과 의복을 채택함으로써 경외감이나 거리감을 제거하고 철저히 피선교지에 녹아진 선교였다. 맥켄지는 이런 선교방식을 선택하였다. "솔내"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며 살고, 그들과 동화되려 노력하고 그들을 위한 철저한 헌신 속에서 낮은 곳으로 행하는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여러가지 풍토적 차이로 인해 고생을 하던 중 솔내에 학교를 세우고 교인들과 함께 교회 신축의 일을 한지 1년여 지나 일사병과 신열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1895년 7월 자살하였다. 

맥켄지는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쳤으나 그는 솔내 사람들이 맥켄지와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청원서와 맥켄지의 유서를 캐나다 장로교 총회에 보낼 정도로 솔내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카나다 장로교 총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맥켄지가 죽은지 3년동안 이곳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하고 함경남-북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그 나라에 신분이나 성별, 나라와 민족의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 만 있을 뿐이다. 섬기는 일에는 많고 적음이나 성공과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섬김 그 자체는 섬기는 삶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더욱 철저히 섬기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매달으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완전한 실패자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는 승리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5-16)

맥켄지 선교사(William John Mckenzie)는 1861년 캐나다 케이프 브레톤에서 태어나 댈하우지 대학(Dalhousie College)과 장로교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대학 시절에 18개월 동안 라브라도(Labrador)에서 개척전도를 했다. 그리고 목사가 된 후에는 로어스튜위액(Lowerstewiack)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했다. 

어느날 갑자기 맥켄지는 한국 선교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선교사역 준비를 위해서 핼리팩스(Halifax)로 가서 수개월 동안 의학 공부를 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제한된 전도비를 받아가지고 교회의 파송 선교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향해 떠났다. 그의 가슴에는“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가 차 있었다.

    맥켄지는 1893년 10월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황해도 솔내(松川)로 가서,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솔내에 정착하여 헌신적으로 선교했다. 그보다 먼저 왔던 펜위크가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에 맥켄지는 같은 캐나다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숨을 다하여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러나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복음 사역이 잘 되어 보람을 느끼며 불철주야로 활동하다보니 그만 육체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는 무리한 사역으로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연읍(邑) 전도를 강행했다가 뜻하지 않게 일사병에 걸렸다.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고, 아직 완공되지 못한 예배당 부속실에 거처하면서 5일간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착란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