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Bruce F. Hunter, 1903~1992)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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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Bruce F. Hunter, 1903~1992)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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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Bruce F. Hunter, 1903~1992) 선교사
  
 

 



 


 

- 한부선(Bruce F. Hunter, 1903~1992) 선교사

브루스 헌트(Bruce. F. Hunt,) 선교사는 박윤선 목사님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 산증인인 분입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헌트(William B. Hunt, 1869-1953 한위렴)는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언더우드, 알렌과 같은 유명한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한 1세대 한국 선교사였습니다. 함경도 재령지방으로 파송됭 1937년 10월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황해도 복음화 운동에 크게 기역하였습니다. 그런 공로로 그를 가리켜,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03년, 브루스 헌트는 그의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한부선입니다. 선교사의 자녀로서 한국이라는 선교지에서 아버지와 다른 선교사들의 지대한 영향 가운데 자랐습니다. 그러던 중, 열 일곱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휘튼칼리지에 입학하였고, 몇 해 후에 선교사의 마음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린스톤신학교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린스톤 신학교는 신학적으로 혼란의 서막이 막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나중에 브루스 선교사는 고뇌와 갈등 속에 신학적으로 변질한 북장로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승 메이첸을 따라 정통장로교회로 적을 옮깁니다. 하지만 가족과 친척이 머물고 있던 유서깊은 교단을 떠나 신생 교단으로 옮기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그가 정통 장로교회 신학을 매우 중요시한 선교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1928년 한국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는 북장로교회 선교사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농촌 지역(특히 청주 지역 중심)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다가 1935년 안식년을 맞아 메이첸이 세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게 됩니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안식년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대다수가 프린스톤신학교 대신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신학적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한 해 먼저 박윤선 목사님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브루스 선교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의 첫번재 만남을 갖게 된 역사적인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50년 동안 두 분 사이의 동역자로서 변치 않는 우정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랜 후에 브루스 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박윤선 목사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는 메이첸 박사 밑에서 수학하는 신학생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박박사를 매우 특별한 친구로 생각하여 왔으며, 박박사께서 신학적 문제들을 깊이 이해함에 있어서 깊은 통찰력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박박사는 이미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독파했으며, 영어 강의를 능숙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p.145)

두 분의 동역은 브루스 선교사님이 1936년 안식년을 마치고 선교지를 만주로 확정하고 다시 돌아오던 때부터 시작되어 해방(1945년) 해방이후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같이 봉사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재개됩니다. 두 분은 1946년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같이 봉사하였습니다. 그 어간에 부르스 선교사는 자신이 속하고 있던 북장로교회를 탈퇴 하고 정통장로회에 가담하여 그 교단의 정식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한국 선교사 2세로서 지극히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였으며(그는 자신을 진정한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누구보다도 한국 교회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생활양식과 한국인의 품성을 매우 존중하였습니다. 때로는 한국인보다도 더 친일세력의 영향력이 사회와 교회 가운데 남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신사참배 회개운동과 교회 순결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개혁신앙의 원리에 따라서 순수하고 건전하게 세워져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마지막 생애를 펜실베니아주로 돌아가 보내다가 필라델피아 근교도시인 애빙톤의 힐사이드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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