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엘리야 박관준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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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엘리야 박관준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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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

1. 회심 (1905년) (30세)

그것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한 190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공중에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절벽 유위면 혈벽입하라!”

소스라쳐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는 ‘이것이 영계의 계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붓을 꺼내서 방금 들은 그 명령을 한문자로 즉석에서 옮겨 보았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그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절벽’은 곧 그의 방탕한 생활이 절벽과 같이 위험한 생활이란 뜻이다. 그러면 이 같은 생활이 위험하니 다른 방향에 옮겨서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혈벽’의 뜻은 곧 이해할 수 없었다. ...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생략...

박관준 장로는 이를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에 영변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2. 부르심 1935년 (60세)

 아버지는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에 걸쳐 드린 아버지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여, 저로 하여금 병으로 죽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1935년 어느 날 밤, 아버지는 한 환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교회당 강도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횐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대답하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거룩한 이가 어떤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들여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아버지는 송구스런 태도로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횐 옷을 입은 거룩한 이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횐 두루마리 위에는 사오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제일 첫 줄에 ‘박관준’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이 명단을 보고 깨어났다. 이것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한 환상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배달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읽으니 아니나다를까 교회에 일대 중대 문제가 돌발했다. 그것은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 평양의 삼숭 자매 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존폐 기로에 직면했다는 톱기사였다. 교회 학교인 평양 숭실 전문 학교에까지 신사 참배 문제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전번엔 국부적으로 중학생들이 강요에 못 견디어 응한 것 같았으나 이번엔 세 학교가 모두 신사 참배를 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동교의 교장이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매큔박사는 당초부터 강경히 신사 참배를 반대함으로써 평안남도 학무국 당국과 일대 정면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기에 폐교의 운명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톱기사였다.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선에 나섰다. 그는 우선 신사문제의 중심지인 평안남도 도청을 찾아가 학무국장에게 신사참배 문제를 재고해 주도록 요청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우가키 총독에게도 1935년 10월 "만약에 총독 각하의 시정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선다면 외람 되오나 각하의 나라 대일본 제국은 필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그 후로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교회에까지 미치자 그는 1938년 2월 직접 미나미 총독을 찾아가 신사참배강요 정책을 항의하면서 이를 철회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3. 평양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환상

수감된 날 밤, 아버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를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성찬을 담은 밥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뒤엎어지며 횐밥이 그릇에서 쏟아지고 흙투성이가 되는 광경이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총회가 실패할 것을 예감했다.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4. 1938년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보낸 편지 원문 초고
.... 국가 장래에 불상사가 있을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측량키 어려운 바이며, 참 신이신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로써만 능히 알 것입니다. 사람은 목전의 일만 볼 수 있으나 신은 구원한 일을 통관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신령과 신비로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교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시대에 선지자들이 시대를 따라 참 신의 계시를 받고 국가 장래에 관한 중대한 일을 민간에 반포도 하였으며, 혹은 국가에 고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소생이 측량컨대 벌써 6회를 통하여 정부를 내방한바 그 노정리수는 합위 일만여리를 산할 것입니다. 전 우가끼 총독 시대에 2회, 현금 각하 부임 이후에 이번까지 4회로 충고 직간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진실로 국가와 인민을 위함입니다. 생은 재천학멸하여 각하를 보필할 만한 정치적 지식은 비록 없을지라도 기독교 신앙 생활 33년 간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을 힘입어 함지사지에서 누차 구출되었습니다. 

2월 5일 각하 면회시에 낭독한 것은 일본 제국에 대한 예언을 환상 중에서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사건입니다. 각하 부임 이후는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 표시하시고 그밖에 환상으로 명령하시므로 천리 밖에서 일부러 찾아와 역혈히 충고하는 바입니다. 성인의 말씀에도 지자천려에 반드시 일실이 있고 우자천려에 반드시 일득이 있다 하였으니, 원컨대 각하는 묵사만념하여 조선 기독교에 문제 된 신사 참배는 교회 자유에 방임함으로써 정부는 관계하지 마시기를 거듭 역혈히 충간하는 바입니다. 

주강생 1938년 5월 27일

위천위인생(爲天爲人生) 박관준

 
5. 일본에 대한 계시 (안이숙 여사, 박관준 장로, 최권능 목사 만나다)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나(박관준)는 50여 년을 예수를 믿어 왔지만 이번처럼 주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은 적은 없었지요. 만일 이같이 원수 놈들의 핍박이 심할 때 하나님이 평안한 때와 같이 가만히 계시면 어떻게 믿는 자들이 이 무서운 핍박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 주는 나의 피난처요 강한 방패요 높은 산성이시니이다.”하며 감격해한다. 

이 놀라운 그의 믿음의 말을 들은 우리는 이 노인(박관준)의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태도에 우리의 태도를 고쳤다. 그는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와 같이 쏟아 내려서 멸망시키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요나가 니느웨에 간 것같이 자기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와 고관들에게 경고하고 싶으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 하니 어찌하오리까 하고 열심히 기도하던 중 계시를 받고 바로 그 다음날 떠나 무작정 평양으로 왔는데 주님이 인도해 주셨는고로 이렇게 대번에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나는(안이숙) “평양성으로 가라”하신 말씀과 “네가 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평생의 소원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다 병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이름으로 칼에 맞아죽든지 스데반같이 돌에 맞아 죽든지 기름 가마에 던짐을 당하든지 해서 단번에 죽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 왔소. 그런데 아마도 내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인지 주님이 나를 단번에 죽게 하려고 하는가 보지요. 죽으면 개도 뜯어 먹지 않을 이까짓 썩어질 몸을 바쳐 주님 위해서 단번에 죽는다면 아! 그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쁨을 어찌 다 감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 저녁은 예배당에서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것이 웬 소린가 해서 그 목소리를 찾아가 보니 평양 성내의 장작 파는 장작터였는데 키가 조그마한 백발의 한 늙은이가 “예수 천당”하고 외치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잡혀가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은 산으로 들로 도망 다니고 숨도 크게 못 쉬는 이런 험악한 시대에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분이길래 저렇게도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 늙은이를 쳐다보고 섰노라니 또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었고 눈은 확신으로 번뜩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 지팡이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저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했더니 그 말을 듣자 그는 성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면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거요? 지금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데 입으로는 밥만 먹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한단 말이오, 응?”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전도였구나. 전도다. 일본에 전도해야 한다. 일본에 경고하라는 것은 곧 전도하라는 것이다. 그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로구나. 그래 그래.”

순식간에 내 마음은 변했다. 이때부터 나는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막 거리로 뛰어나갔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모조리 붙들고 전도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사람은 모두 송장같이 보였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다니며 애걸하며 울면서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권면했다. 붙들고 울며 권하는 내말에 감동을 받는 이도 많았다. 어떤 이는 계속 절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믿는 이지만 더 잘 믿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내가 정신 이상인가 해서 뚫어지게 보다가 도망을 치는 이도 있었다. 여하튼 내 잠잠히 믿던 양식, 즉 기도하고 성경 읽고 외우고 숨어만 있던 내 신앙 생활에 이 두 노인 박 장로와 최권능 목사로 인해서 안팎으로 큰 변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가져왔다. 

“얘! 이숙아, 내가 너를 기독교 학교인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그렇게도 애쓰고 기도했는데도 주님은 너를 기어이 일본인이 가르치는 공립만으로 소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전문학교에까지 보내고야 말으셨다. 너에게 일본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도록 한 것도 이때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이면 속히 순종하고 죽는 것이 지 오래 끌고 기다릴 필요가 무어냐? 너는 일본말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한다고 아버지 비서인 시오상이 늘 말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네게 그런 재주를 주셨는가 했는데 참 주님은 다 경륜이 계셨고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는구나. 그런데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지 않아?”

드디어 나는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나가는 이를 위해 지하 교회 회원 모두가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산과 굴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연락해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했다.

 6. 일본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

그리하여 기도 중에 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 선생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에 건너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 장로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의멸망을 경고하였다. 
...
박관준 장로 일행은 40여일 간의 이러한 유세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을 알게되자 보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경고하고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때 종교단체의 국가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 단체법이 상정 된 제74회 일본 제국회의가 개회중이라 여기에 들어가 경고문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경고문을 준비하고 방청권을 얻어 3월 23일 사전답사를 한 다음 24일 일본 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계획대로 박 장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하고 외치며 두루마리로 된 경고문과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들 경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큰 도는 나라의 한계가 없고, 진리는 중외에 능히 가통하므로 오늘날 동아 오억만 생명의 사활 문제가 이번 의회에 달려 있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섭리로는 그 나라의 종교 부흥 여하에 따라 국가의 패망과 번영이 좌우된다는 것.

셋째, 인간의 정부가 소위 ‘종교법안’을 제정하여 종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간섭하고 탄압한다면 세계와 인류를 통괄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재앙을 내리실 것이니 의회 의원 제공이 진리를 깨닫고 못 깨닫는 데 국가의 흥패가 달렸다는 것.

넷째, 일본 제국의 정부와 국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축복을 받아 강성하여져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강대한 나라 백성을 다 쫓아내고 밟는 곳마다 너희의 소유가 되려니와 돌이켜 마음에 미혹하여 다른 가신과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하심을 받아 반드시 패망하고 만다’는 것(신명:11장 참조).

다섯째, 일본 정부는 신도 등 종교를 폐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독교로 국교를 제정하라는 것.

여섯째,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모두 주장하니,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과 가신(바알 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을 한 것과 같이, 일본 정부 주최로 넓은 광장에 장작 백단씩을 쌓아 놓고 신도, 불교, 기독교의 대표를 그위에 앉힌 후 일시에 불을 질러 그 속에서도 살아 남는 대표가 믿는 종교로써 국교를 창정하자

 7. 감옥에서 받은 계시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옥중지도자들 중에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여사는 기도하는 중에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큰 뱀이 기어 나와 조선 교회를 통째로 삼켜 버리려고 입을 벌리며 달려들자 주기철 목사가 큰 검을 빼어서 그 뱀을 세 동강으로 찍어 내던지는 환상이었다. 이 놀라운 환상을 보고 오 여사는 더욱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옥중 성도들에게 퍼졌다. 뿐만 아니라 주남선 목사와 최봉석 목사는 옥중에서도 개인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죄수들을 위해 옥중 교회를 세우고 신자가 된 죄수들에게 세례까지 주었다. "

1945년 해방 예언 어떤 직원이 간수를 뒤따라오며 무슨 말을 건네자, 간수는 그와 상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라고 한 걸음쯤 아버지보다 뒤처졌다. 이때 안 집사는 재빨리 아버지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얻었다. 

“장로님, 재판 때에 재판장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일본이 대동아전에서 이렇게 승리를 하고 있으니 영감님 너무 고집 피우지 말고 신사 참배에 동의하고 이제는 감옥에서 나가시오’ 하기에 ‘미나미 총독도 나에게 머리를 숙이며 충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재판장인 당신의 말을 듣겠소? 명년인 1945년 8월에는 당신들이 나를 가두어 둘래야 가두어들 수도 없을 것이오. 그때 일본이 망하든지 조선이 독립되든지 간에 끝장이 날 터이니 나는 그때에 나가겠소’라고 말했지.”

뜻밖에도 이 같은 말을 들은 안 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야. 분명히 나는 계시를 받은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이니까‥‥.”

 중략....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뿐인가? 내가 어제 새벽, 그러니까 감옥에서 위독해지기 전날, ‘관준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오늘이 졸업이다. 내일 나가서 삼 일 간만 성경을 가르치고 나 있는 곳으로 오너라.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다. 내가 금면류관과 금띠 한 개를 네게 더 주리라. 이제부터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천국은 다 네 것이다’ 하는 계시까지 분명히 받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뜻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헌신한 지 어언간 팔 년이 되었거든. 참 그대로 맞았지 그런데 ‘삼일 선생’이라는 뜻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감옥에서 나가서 삼 일 간만 성도들에게 신앙 간증을 하라는 뜻인데, 그래도 삼 년은 더 살아야 일본 정부나 총독과 더 싸울 수 있을 텐데, 참 어떻게 될는지.”

안 집사는 아버지의 간증에 감격하고 방금 들은 간증담을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종이를 곱게 꼬아서 단단하게 만든 트렁크 손잡이 같은 것을 이상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장로님, 이게 무엇이야요?”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그것 말이야? 그것은 내가 8월 달에 출옥할 때 내 짐을 들고 나오려고 한 달 동안 노끈을 꼬아서 트렁크 손잡이를 만들어 미리 준비를 해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출옥하신 것이 아니어요?”

“아니야, 진짜 출옥은 금년 팔월달이야.”

안 집사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은 지난번에 예언같이 말한 바를 거듭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아버지는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여 우리가 다 출옥을 하게되고 조선이 독립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안 집사는 마음속으로 금년 8월을 주목하고 있었다. 
......
아버지는 1945년 정월을 맞이하자 금년 8월에는 석방되는 새해를 맞이하였다고 어느 해보다도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정월 중순경 어느 깊은 밤, 아버지는 감방 안에서 홀로 기도를 하고 취침 중에 환상을 보았다.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났는데, 돌연히 양쪽으로 깨지더니 샘(생명수)이 콸콸 솟아나와서 마음껏 마셨다. 또 천사가 나타나더니 ‘만나’ 라는 떡을 큰그릇에 가져오고, 또 때를 따라 다른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것은 생명 과실이다”라고 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아름 꺾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여 마음껏 먹었다. 아버지는 이같이 환상 속에서 영계의 음식물을 먹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시장한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감방에 넣어 주는 관식을 전폐하고 더욱 금식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같이 6년 간 옥중 생활을 치른 아버지는 1945년 8월은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믿고 너무 기뻐서 40여 일 간에 걸쳐 금식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가 혼수 상태에 빠지자 형무소 당국자들도 당황해서 즉시 측근자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나는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계시와 같이 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때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러다가 점점 음성이 작아지더니 향년 70세를 일기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은 이같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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