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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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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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는 솔내교회이다. 솔내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동(松川洞)에 세워진 장로교회였다. 송천(松川)이라는 한자 지명은 "솔내"로 불려졌다. 이 솔내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솔내"는 "소래"라고도 불려졌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서 선교사나 목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였다. 교회 설립의 시작은 1885년 혹은 1886년 서경조의 전도로 이뤄졌다. 이것은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기 약 1년 전이라 할 수 있다. 솔내교회는 맥켄지(Mckenzie) 선교사의 지도로 외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건물을 지었고 1895년 7월 3일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노바 스코시아에 있는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라브라도르(Labrador)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던 중 조선에 대한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회는 맥켄지의 조선선교 지원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1894년 2월 개인자격으로 조선에 입국 하였다. 

그는 조선에 온 다른 선교사들과는 다른 선교방식을 택하였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인과 같은 방식대로 생활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교의 형태에 있어서 몇가지로 나뉘는데 그것은 정복선교, 적응주의선교 등이 그것이다. 정복선교의 대표적인 예로는 "예수회"의 선교라 할 수 잇다. 예수회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장의 루트를 따라 전개되었다. 그들의 선교는 일종의 군림하는 선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고국에서의 일상 삶을 선교에 있어서 십분 이용했다. 자기 문화의 우월성이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적응주의 선교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피선교지에 정착하여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그들과 같은 식사를 하며 그들과 같은 집과 의복을 채택함으로써 경외감이나 거리감을 제거하고 철저히 피선교지에 녹아진 선교였다. 맥켄지는 이런 선교방식을 선택하였다. "솔내"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며 살고, 그들과 동화되려 노력하고 그들을 위한 철저한 헌신 속에서 낮은 곳으로 행하는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여러가지 풍토적 차이로 인해 고생을 하던 중 솔내에 학교를 세우고 교인들과 함께 교회 신축의 일을 한지 1년여 지나 일사병과 신열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1895년 7월 자살하였다. 

맥켄지는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쳤으나 그는 솔내 사람들이 맥켄지와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청원서와 맥켄지의 유서를 캐나다 장로교 총회에 보낼 정도로 솔내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카나다 장로교 총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맥켄지가 죽은지 3년동안 이곳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하고 함경남-북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그 나라에 신분이나 성별, 나라와 민족의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 만 있을 뿐이다. 섬기는 일에는 많고 적음이나 성공과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섬김 그 자체는 섬기는 삶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더욱 철저히 섬기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매달으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완전한 실패자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는 승리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5-16)

맥켄지 선교사(William John Mckenzie)는 1861년 캐나다 케이프 브레톤에서 태어나 댈하우지 대학(Dalhousie College)과 장로교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대학 시절에 18개월 동안 라브라도(Labrador)에서 개척전도를 했다. 그리고 목사가 된 후에는 로어스튜위액(Lowerstewiack)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했다. 

어느날 갑자기 맥켄지는 한국 선교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선교사역 준비를 위해서 핼리팩스(Halifax)로 가서 수개월 동안 의학 공부를 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제한된 전도비를 받아가지고 교회의 파송 선교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향해 떠났다. 그의 가슴에는“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가 차 있었다.

    맥켄지는 1893년 10월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황해도 솔내(松川)로 가서,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솔내에 정착하여 헌신적으로 선교했다. 그보다 먼저 왔던 펜위크가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에 맥켄지는 같은 캐나다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숨을 다하여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러나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복음 사역이 잘 되어 보람을 느끼며 불철주야로 활동하다보니 그만 육체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는 무리한 사역으로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연읍(邑) 전도를 강행했다가 뜻하지 않게 일사병에 걸렸다.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고, 아직 완공되지 못한 예배당 부속실에 거처하면서 5일간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착란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질병과 싸우며 다음과 같은 글을 일기의 마지막 장에 남겨 놓았다.

    마지막 일기   6월 23일(토요일)
   “…(전략)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은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중략)… 내 마음은 평안하며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같은 날 그는 닥터 애비슨(Oliver R. Aviso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글을 써놓았다.
   “에비슨 박사님, 일주일 전에 저는 60리 정도 떨어진 장연읍에서 타는 듯한 폭양 밑에서 2일간이나 걸어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은 흰 한복을 입고 한기를 느낄 때까지 밖에 앉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일주일 전부터 체온이 오르고 입맛을 잃고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더운 물을 가지고 땀도 내고 두꺼운 옷을 입어도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돕기 위하여 박사님이나 다른 분이 올 수 있겠는지요?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사님이 할 수 있으면 부디 친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6월 23일  W. J. Mckenzie
   그는 이 편지를 발송하지 못한채 숨졌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낯선 땅에 와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선교 활동을 하다가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 것이다. 너무도 변해 버린 생활환경과 문화적 차이와 고독에서 오는 정신적 불안정에 의한 질환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갔다. 그는 1895년 여름, 극통의 병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895. 7. 23).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설교가 필요없었다. 사랑과 헌신, 이 겨레와 함께 가난에 시달린 이 서양인, 그 까닭이 무엇일까? 묻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치르고 나니 오히려 불신자들이 그 동안의 공적을 치하하고 호평하며,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비 앞면에는 영문으로 ‘윌리엄 존 맥켄지. 1861년 캐나다에서 출생. 1895년 한국에서 별세'뒷면에는 한글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893년에 맥켄지 목사가 캐나다로부터 여기 내류할 때 동포는 외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교인은 몇몇 안 되는 때라. 폭양에 열심히 전도하더니 열병에 정신없이 기세(棄世, 세상을 버림)하여 일동이 애석해 하며 다 주를 믿는지라.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소래 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도다.'
이 비석은 맥켄지의 약혼녀 맥컬리(Miss E. A. Mccully)양이 세운 것이다.

    약혼녀
 맥켄지의 약혼녀 맥컬리 양은 맥켄지와 함께 펼칠 장밋빛 꿈을 안고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약혼자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솔내에 내려와 고인이 된 약혼자의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맥켄지의 유산 3천 냥을 솔내 교회에 헌금하였고, 교회에서는 이 돈을 해서 제일학교 설립 기금으로 사용했다.

   맥켄지의 외로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스치고 지나갔다. 약혼녀 맥컬리양은 한국을 떠나지 않고 원산 지방에 머물며 열심히 선교에 임했으며 “한국에서의 맥켄지의 생애(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the Rev. W.J. Mckenzie of Korea)”라는 글을 썼다.

 
   주민들의 간청
   맥켄지가 별세한 후 그의 유서와 함께 솔내 교회 교인들의 진정서가 캐나다 장로교총회 해외 선교부에 보내졌다. 진정서의 내용은 맥켄지의 신앙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면서 기독교인 선생을 한 사람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진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맥켄지 목사님의 친구요 동역자이며 형제이신 여러분께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고 또 기도 어린 관심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멕켄지 목사 님이 한국에 오신 후 그분은 황해도 장연의 솔내 마을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솔내 마을은 언제나 아주 사악한 곳으로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캐나다에 계신 우리의 형제들께서 기독교인 선생님 한 분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솔내에 있는 기독교인들 올림   1895년 12월 26일'


    더욱이 솔내 교회의 한 늙은 신자는 캐나다에 편지 한 장을 띄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서 이 편지가 그곳에 닿으면 외국인의 눈을 뜨게 하여 이 나라의 절실한 요청이 무엇인지 보게 해주시기를...'이라고 기도하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맥켄지의 죽음에 대한 소식과 솔내 교인들의 호소는 캐나다 교회 내에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내 캐나다 장로교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P. Foote) 목사, 매크레(D. M. Mcrae) 목사,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 사람을 파견하였다.

    소명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아일 유(Isle Ewe)라는 섬에서 아버지 케네드(Kenneth) 매킨지와 어머니 케더린(Catherine) 사이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맥켄지가 5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의 삶은 순탄하지 못하여 16세가 되던 1881년 10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난 그는 1882년 봄 글라스고(Glasgow)로 갔다. 이곳에서는 드와이트, 무디, 생키 등 미국의 부흥사들에 의해 전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신앙 부흥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맥켄지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무디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그는 1883년 봄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결심을 이루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생활 대책이 서지 않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교육과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맥켄지는 1885년 1월 중국으로 파송되는 ‘캠브릿지 세븐’(Cambridge Seven)이라고 불리우는 일곱 청년의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캠브릿지 세븐이란 캠브릿지 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일곱 청년이 자신의 모든 희망찬 미래를 뒤로 하고, 복음을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하고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으로 중국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결단과 사역은 그 이후의 선교사역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맥켄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85년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해 1891년 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가을에는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 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였다.

   한편 맥켄지로 하여금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페이튼(John Paton)이었다. 페이튼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는 1858년 스코틀랜드의 개혁 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의 파송을 받아 뉴 헤브리디즈로 가서 일한 개척 선교사였다. 

그는 죽음의 위험과 고통스런 날을 인내하면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피선교지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했던 인물인데, 후일 그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로 이적하였다. 

그가 1881년부터는 영국과 영국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선교집회를 열고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여러 후원자를 통해 얻은 후원금으로 데이스프링(Day spring)이란 이름의 배를 구입하고 여러 섬들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시약을 베풀었던 일은 유명한 일로 남아 있다.

 페이튼이 1894년 글라스고를 방문하고 글라스고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맥켄지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때가 1894년 1월 14일 주일 오후였다. 1월 17일의 모임에도 다시 참석하였다. 

이 페이튼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확실히 분명히 결단하게 되었고, 과거에는 중국을 생각했으나 이제는 식인 습관과 무지와 폐습에 빠져 있는 뉴 헤브리디즈로 가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맥켄지가 페이튼의 강연을 들을 때 지금 필요한 것은 사실 선교 기금이 아니라 선교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확신은 그로 하여금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자원하게 만들었다.

    매켄지는 매주일 모이는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 선한 열심은 또 다른 축복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도회를 통해 후일 그의 아내가 된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를 만났고 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가렛 켈리는 1870년 1월 17일 생인데, 콩고에 선교사로 갈 목적으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여성이었다. 이후 이들은 함께 뉴 헤브리디즈의 산토(Santo) 지방에서 일하도록 페이튼으로부터 정식 부름을 받았다. 이들은 선교지로 가기 전인 1894년 7월 3일 결혼하였다.

 뉴 헤브리디즈 선교
    4월 4일 시드니를 떠난 매켄지 부부는 4월 11일경 빌라 항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산토(Santo)로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임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이곳을 떠나기까지 15년을 일했다. 우선 그는 이곳 언어인 노구구(Nogugu)어 공부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어 선생의 죽음으로인해 독학으로 언어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인내하면서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언어에 진보가 나타나자 1896년 8월에는 성경 공부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열매에 1897년 3월 25일에는 첫 열매를 얻었다. 즉 이날 그는 12명의 현지인들에게 세례를 배풀어 원주민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쁨과 함께 많은 반대와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이국의 문화, 이국적 풍습, 특히 식인 습관이 남아 있는 문명의 오지에서 삶을 가꾸어 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으나 그보다 어려운 일은 복음의 대적들이었다. 이들의 계속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일들을 감내하면서 15년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1908년 12월 4일 열병으로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그의 아내를 앗아갔던 열병은 맥켄지 자신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 열대 지방에서의 생활을 다시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멜버른으로 돌아가 있던 맥켄지는 다시 임지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심했다. 의사는 맥켄지가 산토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민하던 그는 15년간 일했던 산토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1909년 5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 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에 임지를 한국으로 옮겨 주도록 정식 요청했다.


   맥켄지는 해외선교부가 아니라 여전도회 연합회(PWMU) 산하에 조직된 청소년 선교단(Young People s Mission Band)의 선교 후원을 받고, 이 단체의 첫 선교사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때 아동 선교단(Children s Missionary Band)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단체는 선교사를 돕기 위해 아동들이 생일 헌금 혹은 저금통을 열어 선교사를 후원하도록 지도했던 선교 후원 운동으로 시작된 매우 뜻있는 조직이었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10년 1월 초 한국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1910년 1월 5일 멜버른을 떠난 그는 선편으로 시드니로 향했고, 다시 그곳에서 엠파이어 호(S. S. Empire)를 타고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입국 
   맥켄지는 5주간의 긴 여행을 거쳐 1910년 2월 2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물론 이 기간 계속 여행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서 4일간 체류하였는데, 이때 CMS 선교사와 함께 지냈고 상해에서 1주일간 체재하였다. 

   그가 부산항에 도착하였을 때 엥겔 선교사 부부, 무어, 니븐 등이 마중 와 주었고 심취명 장로, 박장로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그의 부산 도착을 환영해 주었다.

    맥켄지는 일단 엥겔 목사 집에 머물면서 이곳에서의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6월에는 진주를 방문하였는데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전에 일했던 뉴 헤브리디즈와는 다르다는 점을 체험하는 날들이었다. 기후와 계절은 물론이지만, 관습과 풍습이 달랐고 주거 환경과 촌락 구조가 달랐다. 그가 여전도회 연합회가 발간하던 정기 간행물 『더 크로니클』(The Chronicle)에 쓴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당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910년 8월 8일은 맥켄지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 맥켄지는 1905년 내한하여 부산 지방을 거쳐(1905~1909), 1909년부터는 진주에서 일하고 있던 메리 켈리와 약혼을 선언하였다. 아버지의 전기를 쓴 헬렌 맥켄지의 기록에 의하면 맥켄지 선교사는 그해 7월 경 진주의 켈리 양에게 청혼의 편지를 썼는데, 메리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동료 여선교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혼에 응하였고, 그해 8월 8일 부산에서 약혼을 선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12년 2월 10일(어떤 기록에는 2월 13일로 되어있음) 홍콩의 성공회 소속인 성 베드로 교회(Church of St. Peter)에서 윌리엄 헤윗트(Rev. William H. Hewitt) 목사의 주례로 이날 예식은 성공회식으로 치러졌다.

   1905년 내한하여 부산(1906~1907)과 진주에서(1907~1910) 일했던 켈리는 이제 맥켄지 부인이 되어 부산에서 선교사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남편인 맥켄지보다 5년 앞서 내한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33년간 봉사하였고, 1938년 선교지에서 은퇴하여 호주로 돌아간 후 1964년 1월 11일 별세하였다.)

   부산 나환자 수용소
   부산 나병원 사역은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에서 일하고 있던 의사 어빈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어빈(C. H. Irvin)은 1909년 주민들의 거주지와 격리된 부산 감만동 지역의 땅을 매입하고 약 40명의 나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세웠다. 수용소가 공식적으로 개원한 때는 1910년 5월이었으나 이미 1월부터 환자 30명을 수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 부산 지방이 호주 장로교의 선교 구역으로 결정됨에 따라 나병원 관리도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맡게 되었고, 그 초대 원장에 맥켄지가 선임된 것이다. 그가 이 병원을 맡았을 때는 이미 환자가 8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국에 부임하기 이전 이미 그라스고오에서 의사로서의 훈련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의 적임자였다. 1909년 나병원이 설립되었다고는 하지만 초창기에는 특별한 시설이나 지원이 없어서 나환자에 대한 특별한 치료를 거의 하지 못하고 다만 그들이 죽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마침 여행 중 한국에 들른  영국 구라 선교회 의 베일리(Bailey) 부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1,500달러를 기부하고  영국 구라 선교회 가 한국의 구라 선교를 계속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 같은 원조를 바탕으로 맥켄지는 본격적인 나병원을 시작할 수 있었고, 나환자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상애원(相愛院) 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16년 무렵부터는 나병 치료의 특효약이라 불려지는 대풍자 기름이 입수되어 치료에 쓰이게 되어, 1918년에는 25퍼센트에 이르던 환자 사망률이 1923년에는 2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에는 최초로 환자 44명을 완치하여 퇴원시켰는데, 이 소문을 들은 많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오게 되었다.

    나병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므로 이들은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었고, 필요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없었기에 이들이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과 일용할 양식, 그리고 가능한 의료 혜택을 베푸는 일은 실로 기독교 신앙 아래서만 가능한 거룩한 사역이었다. 이런 한국의 현실 때문에 부산의 나환자 수용시설에 이어 광주에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윌슨 의사(Dr. R. M. Wilson)에 의해 광주 수용소가 설립되었고, 플레쳐 의사(Dr. A. G. Fletcher)에 의해 대구 수용소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나환자 수용시설은 ‘상애원(相愛園)’ 혹은 ‘상애원 요양소’라고 불렸는데, 지금의 부산시 남구 감만동 부산 외국어대학과 그 뒤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맥켄지는 이 상애원의 일을 맡으면서 환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생활여건을 개선하고 가능한 치료 방법을 연구하여 약물치료를 시행하고, ‘상애원교회’를 설립하여 전도와 예배를 통해 신앙적 지도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나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변함없는 기독교적 사랑으로 이들을 돌보았기에 한 노령의 요양소 출신 인사는 맥켄지 선교사가 ‘성자(聖者)’였다고 회고하였다. 

나환자 선교회와 당시 정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용소 시설은 확충되었고 더 많은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노력의 결과로 1923년 맥켄지는 나환자들을 위해서 헌신해 온 다른 두 사람의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사이또 총독으로부터 훈장과 함께 4백 엔을 포상으로 받기도 했다. 

이듬해인 1924년 1월에는 히로이또의 결혼을 기념하여 맥켄지는 역시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해 온 광주의 윌슨 의사, 그리고 대구의 플레쳐 의사와 함께 2급 포상을 받았고, 또 200엔의 하사금을 받기도 했다. 수용소의 규모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제한된 시설로는 입주 희망 환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한 신앙 지도와 예배 등의 결과로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1926년에는 수용소 내에 새로운 교회당이 신축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수용자 수가 580명에 이르렀는데 이 당시 세례 신자는 234명이었다. 수용 인원이 가장 많았던 때는 약 65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환자들을 위한 이러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한 총독부는 1922년부터는 연간 500엔씩(그 후에는 지원액이 상향조정되었음)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1928년에는 히로이또의 천왕 즉위를 기념하여 맥켄지는 다시 윌슨, 플레쳐 등과 함께 푸른 리본 메달을 수여 받았다. 

1930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또 한 차례 훈장을 받았으므로 맥켄지는 도합 4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 혹은 훈장을 받았다. 
이 해에는 맥켄지의 한국 선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나환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기념비를 부산진 좌천동 일신병원 옆에 세웠는데, 이 비는 1940년대 소실되었다.

   맥켄지는 본래 정식 의사는 아니었다. 짧은 기간 의료 교육을 받은 일은 있었으나 나환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간간이 필요한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931년에 시험을 거쳐 의사 면허를 받았다. 
이제 그는 합법적인 의사 면허 소지자로서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자신이 직접 사망 확인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환자 수용소가 아닌 나환자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4년 2월 나환자 수용소 내의 새로운 병원 건물 헌당식이 있었다. 특히 이날 개원식에는 호주 장로교 총회장이 참석함으로써 더욱 의미 있는 개원식이 되었다. 

총회장인 맥카우레이 목사(Rev. R. W. Macaulay)는 한국에서의 선교 상황과 호주 선교부의 사역을 점검하고, 그 우선 순위를 결정짓는데 필요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1933년 12월 한국을 방문했는다. 

그가 참석한 가운데 병원 개원식을 갖게 된 것은 여러 가지로 뜻 깊은 일이었다. 나환자 수용소에서는 지난 25년간에도 환자들에게 시약과 시술을 베풀었으나 이제 명실상부하게 병원이란 이름을 얻게되었으니 무엇보다 뜻 깊은 일이었다. 

이 건물은 수술실 등 병원으로서 필요한 설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중식 난방 장치를 갖춘 현대식 건물이었다.
   맥켄지는 나환자들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과 헌신으로 봉사하였기에 실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신뢰를 얻게 되었다.

   1935년에 수용소의 환자들은 맥켄지의 한국에서의 사역 25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를 한 일이 있다. 이들은 수개월 전부터 준비하여 맥켄지 기념문(Mackenzie Memorial Gate)을 설치하고 성대히 그의 봉사를 기념했던 것이다. 

이 날의 행사는 단순히 격식이나 요식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애정 어린 사랑과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것은 나환자들이 수용소 교회만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의 교회들을 돌볼 수 있는 전도자를 파송,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그 전도자를 ‘맥켄지 기념 전도사’로 호칭한 것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수용된 환자 수는 600명을 상회하게 되었고 그의 역할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은퇴
  맥켄지는 부산에 거점을 두고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 외에도 경남 노회 소속 지역 교회를 관할하는 책임을 수행하였다. 

그가 맡은 교회는 1912년 당시에는 약 20여 개처 교회였으나 1916년에는 5개 지역의 52개처 교회로 증가되었고, 그 관할 하에 있는 세례 교인 수는 1,200여 명에 달했다. 

5개 지역이란 부산과 부산의 동부 지역인 동래, 기장, 울산, 온양 등을 말하는데 이 지역의 교회를 맡았던 것이다. 그의 노력의 결과로 장안제일교회 등을 설립하였고, 또 양산 교회 등 여러 교회의 당회장으로 봉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인 목사 두 사람과 함께 부산 시내의 8개처 교회의 동사 목사 혹은 협동 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래서 그는 연중 약 80일은 담당 지역을 순회하며 학습, 세례 문답자를 면담하고 설교를 하며, 지역 교회를 위해서도 봉사하였다. 

특히 그는 울릉도 지역 교회를 시찰하도록 위임 받았다. 그는 울릉도를 방문한 첫 호주 선교사였다. 
그가 지역 교회를 순회할 때 한국의 신자들이 너무 가난하여 이들에게 누가 될까하여 자신이 먹을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맥켄지 부인 켈리는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반 인도와 경남 여자 성경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등으로 바쁜 날들을 보냈다.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 내한한 이래 3차례의 안식년 휴가 기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와 지역 교회를 섬기는 일을 했다. 
마침내 한국에서 떠날 날이 다가 오고 있었다. 아직 은퇴는 아니었으나 네 번째 안식년 휴가를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사실상 한국에서의 은퇴였다. 
이를 예견하듯이 1936년 이후 맥켄지 선교사의 건강이 좋지 못했다.

   맥켄지 선교사 내외는 그 동안 사귀며 함께 한국을 위해 일해 온 동료와 한국의 친구들, 그리고 한국의 정부 관료 등으로부터 후의와 석별의 인사를 받고 1938년 2월 18일 부산을 떠났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휴가를 보내기 위함과 동시에 카이로에서 모이는 제4차 국제 나병 협의회(International Leprosy Congress)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맥켄지는 1939년 6월 30일 선교사직을 은퇴하였다. 1951년부터는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56년 7월 1일 저녁 그는 그간의 아픔과 고통을 잊은 채 얼굴 가득히 평화와 안식을 간직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일신 기독 병원
   1956년에 맥켄지 목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약속한 말대로 두 딸을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초등교육을 받았던 맥켄지 목사의 큰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Dr. Helen Mackenzie:매혜란)와 둘째딸인 간호사 캐더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매혜영)는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시 동구 좌천동 ‘부산진 교회’의 ‘일신 유치원’에 ‘일신부인병원(Il Shin Women s Hospital) 을 설립하였다. 

그 후 한때 ‘부산진 교회’였던 현재의 자리에 병원을 신축하여 운영하다가 20년을 마무리하고 1972년 9월에 ‘부산진 교회’의 김영선 의사에게 원장을 넘겨 운영케 하고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후 관계 교육기관의 신설, 진료 과목의 증설, 200병상의 시설 확장 등 발전을 계속하다가 1982년 11월에 종합병원으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일신 기독 병원’으로 개명하였다.

   1985년에 공군 의무감 출신인 ‘부산진 교회’의 박경화 장로가 제3대 원장에 취임하면서 세계 은행 차관으로 ‘모자 보건 센터’와 함께 병원을 크게 확장하여 지역 굴지의 우수 병원으로 발전하여 병상 320개를 가지고 하루 외래 환자 1천 명, 매년 분만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 후 병원 발전의 긴 안목을 가지고 1999년 부산의 변두리인 북구 화명동에 직원 80여 명, 병상 70개의 ‘화명 일신 기독 병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혜란, 혜영 자매는 귀국 후 수시로 자신이 설립한 병원을 찾아와 과거에 출석하였던 ‘부산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2002년 9월에는 ‘맥켄지 역사관’을 개관하고, 맥켄지 목사의 입국 2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건립하여 소실된 기념비를 ‘일신 기독 병원’과 ‘상애 교회’가 공동으로 ‘일신기독병원’옆에 복원 제막하고, 부산진 교회는 부산에서 순교한 데이비스 목사의 묘비를 복원하여 교회 뜰에 제막하였다.


병원에 관계되는 많은 자료는 ‘일신 기독 병원’의 ‘맥켄지 역사관’에 전시, 보존되어 있다.

 상애 교회
   맥켄지 목사가 운영하던 병원이 있었던 감만동 넘어 용호동에는 맥켄지 목사가 있을 당시에 출석하던 성도가 섞여 있는 ‘상애교회’ (당회장 이상붕 목사)가 있었다.
   호주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찬 리뷰’지(발행 겸 편집인:권순형/ 편집국장:김명동)에서 2000년 4월부터 11월까지의 <현장취재>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의 6월호의 기사는 지금의 ‘상애교회’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1904년에 어빈(한국명:어을빈)과 빈톤 의사(Dr. Irvin and Vinton) 그리고 스미스 목사(Rev. W. E. Smith) 등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나환자를 돌보는 일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나환자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7년 ‘인도와 동양지역 나병 선교회(The Mission to Lepers in India and East)’가 한국에서 나환자를 위한 선교 사역 기금으로 400 파운드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나병 선교회’는 베일리(Wollesly C. Bailey)라는 장로교회의 교육선교사에 의해 1894년 더블린(Dublin)에서 창립된 선교 단체인데, 나환자를 위한 실로 엄청난 봉사를 한 선교단체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나환자를 위한 사역은 시작되었고, 나병 선교의 재정지원으로 1909년 나환자 수용소(Leper Asylum)가 부산에 건립되었고 ,이듬해 곧 1910년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환자 수용소가 ‘호주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10년 2월 내한한 맥켄지 선교사가 이 일에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맥켄지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15년간 뉴 헤브리지(New Hebrides)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고, 1910년 한국으로 온 것이다. 

비록 그는 목사 선교사였으나 그라스고오(Glasgow)에서 일정기간 의료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환자들을 돌보는 중임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환자 수용소는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수가 증가되었고, 1911년에는 50여 명으로 1914년에는 80여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후는 650여 명의 나환자를 수용하는 나환자 정착촌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상애원’이다.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 2동 산 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상애원(相愛院)’은 나환자 정착촌이다. 기자는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여 줄까 가슴 졸이며 이상규 교수를 따라갔다. 역사 신학이라는 독특한 학문 영역을 구축해 온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 그는 ‘장기려 박사 기념사업회’ 학술부장으로, 개혁주의 ‘교회사학회’ 총무로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상애원’의 입구에서부터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가구점들이 기자의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했는데 이 교수는 새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환자를 만나면 악성피부질환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정문 입구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낡은 기념비가 우리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1930년 5월 ‘대영 나병자 구라회’에서 세운 기념비이다. 거기서 좀 거슬러 올라가면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상애원’은 햇빛을 듬뿍 받는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풍수에 문외한인 기자가 보기에도 주위의 형세가 예사롭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도 가축을 키우던 축사가 그대로 있어 가축 냄새가 나는데 정면에는 ‘오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사청송의 아름다운 풍광과 난대성 관상수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취재진은 '상애교회' 당회실로 안내되어 이상붕 목사와 한센병자의 역사의 증인인 이상곤 장로(88세, 상애교회 원로장로)를 만날 수 있었다.
   "장로님,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작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늦었습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이상규 교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아요."

 
  1946년 ‘소록도 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는 이성곤 장로의 본명은 이재우. 그는 나병으로 인해 한쪽 눈을 실명했고 거기다 오그라든 손발, 그리고 뒤틀린 얼굴이지만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활기차고 힘이 있었다.

   "원래 부산 지방의 나환자 정착촌이 있었던 곳은 감만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때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해방 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곳 용호촌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54년 동안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감만동에서 소록도로 이주한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시겠습니까?"
   "1940년 12월인데 행정요원까지 완전히 철수한 것은 1941년 3월이었지요."
   "당시 환자들은 몇 명이나 됐습니까?"
   "당시에 650여 명이었는데 소록도로 간 환자는 390여 명이었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당시 감만동에 있는 병원은 시설 규모가 어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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